겨울방학 동안 외가 살이 하는 10살박이 외손녀와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아내가 다급히 물었다.
"싱크대 옆 구석지기에 놓여 있던, 계량컵에 담겼던 물 우쨌어예?"
"그 물? 그거, 예담이랑 라면 끼리 뭈는데."
아내 얼굴이 굳어진다 싶더니 이내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다.
직감적으로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와 그라는데? 그 물이 뭐 우쨌는데 그라요?"
한참 망설이던 아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 가관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요 근자 한 10년 이래 가장 큰 목소리로 아내를 힐난했다.
무지막지하게 고성을 내지른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살다 보면 내가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지인의 안타까운 사정을 전해 듣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러니까 삼십 년도 지났지만 아직까지 형형하게 기억되는 이런 일이 그런 경우다.
한때 내가 근무했던 회사에서 생겼던 일이었다. 타 직장으로 일터를 옮긴 후 얼마지 않아 들은 얘기다.
한 부서장의 이삿날에 해당 부서원들이 일손을 보태기 위해 모였었나 보았다.
당시만 해도 '포장이사'업이 성행하기 전이라서, 일일이 짐을 싸서 용달 트럭까지 사람 손으로 날라야 했다.
알다시피 이삿짐을 싸고 나르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마침
한 직원의 눈에 박카스 병이 띄었고, 그걸 자기가 마시자니 무색해서 근처의 다른 직원에게 권했단다.
땀을 많이 흘려 갈증이 나던 참에, 박카스를 양보 받은 사람은 맛있게 들이마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약물 중독으로 병원으로 실려가 위세척을 했으나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박카스 병에는 화초의 병충해를 구제하기 위한 살충제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운명한 그분은
나도 익히 알던 분이라 안타까움이 더했다.
이런 일을 기억하고 있는 내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내가 말했다.
싱크대 곁에 놓였던 계량컵에는 살균 소독제 '락스'가 담겨 있었다고...
아내의 말을 듣자마자 앞뒤 재지도 않고 일단 버럭 성질부터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그렇다 치고 손녀까지 위험에 빠질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손녀에게 락스로 라면을 끓여 먹였다는
자각을 하자마자 할애비의 눈이 뒤집힌 것이다.
"도대체 정신이 있소, 없소. 계량컵은 항상 정수기의 물을 받아먹는 긴데,
거기에 락스를 붜 놔삐모 우짜자는 얘기요? 사람이 우예 그래 생각이 없노.
그거는 사이다 병에 농약을 부어 놓은 기나 뭐가 다르요? 거 참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구만. 그렇다면 미리 얘기를 했어야지. 그러키나 생각이 없단 말이요?"
자비 없이 쎄리 퍼부어 대는 역정에 아내는 멘붕이 왔나 보았다. 자기는 자기대로 뭔가 크게
잘못했다 싶은 중에 남편이란 작자가 평소답지 않게 따발총보다 빠르게 속사포로 쏘아붙이니
궁매 정신을 못 차렸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씩씩대고 보니 왠지 정도가 지나친 것도 같고, 또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가만있자, 락스 물로 라면을 끓여 먹은 뒤 벌써 두어 시간이 지났고, 손녀도 아직 별다른 징후가 없고....
거 참 이상하네. 락스는 제법 독한 표백제로 알고 있는데, 도대체 우이 된 일인공..."
슬슬 제정신으로 돌아오니 하나씩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차차로 정신머리가 수습되면서 헝클어졌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다행하게도, 손녀에게 끓여준 라면 물은 정수기로 새 물을 받아서 끓여줬던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내가 좀 성급했구나 싶어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단 손녀는 별일이 없을 거라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면 내가 끓여 먹은 물은?
나는 라면 한 개로 모자라, 먹다 남은 누룽지 숭늉이 있어 거기에 계량컵의 물을 부어
누룽지라면을 끓여 먹은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알고보니 계량컵에 담아 두었던 물은 락스 원액이 아니었단다. 컵 소독을 위해
물에다 소량을 섞어 희석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살균효과를 위해 금방 비우지 않고
싱크대 한쪽 구석에 밀쳐 두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정황을 조합해 보면, 락스 탄 물로 조리를 하긴 했는데 소량이라서 그때까지 별다른 징후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치사량에 많이 못 미치는 양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농을 좀 섞어 얘기하자면, 잘하면 보낼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나 할까.
"여보, 미안하요. 그런 줄도 모르고 성질부터 부려서..."
일단 아내에게 사과부터 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한 번 삐끼면 쉬 제자리로 돌아오는 몰캉한 사람이 아니다.
더 싹싹 빌거나 시나브로 시간이 좀 지나야 풀리는 속성을 가진 사람이다.
아내를 어떻게 구슬릴지 잔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멀쩡하던 내 몸에 뭔가 요상한 증세가 감지되었다. 지금껏 멀쩡하다가 마치 마술처럼,
락스 탄 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부터 몸에 뭔가 신호가 오는 것 같았다.
속이 더부룩한 것도 같고, 조금은 쓰린 것도 같고 아무튼 불쾌한 느낌이 스멀스멀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런 걸 두고 '가르시아 효과'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뇌의 알고리즘이 얍삽한 방향으로
프로세싱 되어 무다이 아파야 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락스 탄 물을 섭취했으니 당연히 아파야 할 것 같은, 나는 무조건 아파야 해,
아픈 게 정상이야,라는 억지스러운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아니었다.
실제로 내 몸 안에서는 유쾌하지 않은 어떤 작용들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락스와 함께 섭취한 음식물이 어디쯤 당도해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화 과정이 그리 매끄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에는 장에 가스가 차는가 싶었다. 그래서 이건 가스겠지 싶어 방출하는 시늉을 취했더니
아뿔싸. 그건 우리가 다 아는 그 가스의 방귀가 아니었다. 찔끔 하자마자 괄약밸브를 급히 조였다.
이내 꼬로록거리는가 싶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꾸루룩으로 바뀌었다가 급기야 쿠르릉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워터파크의 인조 파도처럼 몰아치는 것 같더니만 이내 얌전 모드로 있다가 또
우레같이 꿈틀거리는 변덕이 번주차로 반복됐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매우 신선한 증세였다. 하긴 소량이라고는 하지만, 난생처음 락스라는 걸
복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말이다.
아, 이것이 락스의 효능인가.
내 몸에 흡입된 살균 소독제란 놈들은, 저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 같았고,
나는 끽 소리 못하고 그들이 시전하는 화학작용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벌 날날이하듯 화장실 문을 열고 닫았다. 대장내시경 전날 복용한 약으로
화장실 드나들 때와 흡사했다. 배출되는 정황도 유사했다.
소량의 락스가 희석된 물로 라면을 좀 끓여 먹었기로서니 이렇게 적나라한 결과를 맛보다니.
표백 소독제의 성능이 이러키나 쓸만하단 말인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큰 방에 화장실이 딸려있기 다행이었다. 표나지 않게 들락거리면서 아내에게는 함구했다.
엄살이 꽤 많은 기질이지만, 가뜩이나 미안하게 생각하는 아내에게 이런 정황을 들키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나 홀로 다방'을 여러 번 들락거리다가 이 정도쯤으로는, 생사를 넘나들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슬며시 엉뚱한 아이디어가 또아리를 틀었다.
'내일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밍기적거리고 있으면 집사람이 방문을 열어볼 테지,
아무런 기척을 보이지 않고 그저 숨 쉬지 않는 척...... 그러면 혼비가 백산하겠지....'
이런 소갈머리 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우찌 알고 장에서 크르릉 하고 또 신호를 띄웠다.
아마도 배 안의 창시가, 꼭대기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뇌에게 꾸지람의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지발 철 좀 들라고. 나이가 몇 갠데 쿠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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