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소리

귀밝이

-마당- 2024. 2. 24. 22:10

 

옛날 같으면 달집 짓는 재미로라도 정월 대보름을 기다렸지만

이제 그런 풍물이 거의 사라지거나 달집 태우기 행사를 한다고 해도

예전 같지 않아 흥미를 잃은 지 꽤 오래다.

단지 즈그마이가 보름맞이 음식 준비하는 걸 보고, 아하, 

낼모레가 대보름이구나 하고 자각하는 것이다.

 

올해 보름밥은 저녁 식사로 갈음하게 되었다.

시금치, 고사리, 콩나물, 다래순, 고매쭐구지 졸인 것, 무나물...

어김없이 보름 나물이 등장했다. 우리 집 보름 음식도 달집 문화

사그라드는 것이나 다름없이 예전과 차이가 많이 난다.

전에는 제법 풍성하게 준비했지만, 이제 먹을 입도 준 데다 나물

아니고도 맛난 찬들이 많아서 그런지 상차림이 영 빈약하다.

 

보름 식단에서 내가 가장 반기는 건 귀밝이술이다.

올해 즈그마이에게 귀밝이로 당첨된 주류는 탁배기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식탁에 차려진 귀밝이의

품격에 따른 시시콜콜한 의견 차이가 생긴 것이다.

 

"어허, 막걸리 병째로도 모자라 커피 잔에 술을 따라 먹으면

되겠소. 명색 정월 대보름 술인데..."

 

"마 그냥 드입시더. 그기 그기지, 커피 잔이나 막걸리 잔이나

그맛이 그맛이지, 귀찮크로 온갖 걸 다 따질라 캅니꺼?"

"에헤, 봅시다. 내가 가져 올끼끼네 당신은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소."

 

자리에서 후딱 일어나, 탁배기 전용 뚝배기에 전용 술잔에 퍼먹는

전용 바가지까지 모양을 차렸다.(이게 뭐가 그리 중한 공 모리겠지만...ㅡ,.ㅡ)

 

 

 

즈그마이 두어 잔 찌뜨리고 나머지를 다 들이키고 보니 술기운이

조금 돌기는 한다. 귀밝이술은 그냥 입술 적실 정도만 마셔도 되는데

귀밝이 치고 좀 많이 퍼마신 건 아닌가 싶어 민망스러운 맛이 전혀

없지 않다.

 

그렇지만 아무리 귀밝이라 하더라도, 술은 술을 부르는 법.

탁배기 몇 잔으로 양이 차지 않으니 어쩌면 좋을꼬.

즈그마이 가재미 눈을 감수하고라도 조금 더 달릴까, 우짜까 하다가

관뒀다. 술 몇 잔에 쪼잔한 꼴을 보이는 것도 썩 내키는 일이 아니라서

걍 막살하고 말았다.

 

귀밝이도 걸친 김에, 어제 놀러 갔던 이바구 게시글이나 마저 끄적거리고

얼른 자리나 깔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