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진 고수 두 분과 마산 창동을 찾았다.
내 학창 시절 창동은 마산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가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공단이 조성된 창원은 점차 융성해진 반면
마산은 유동 인구가 차차로 줄면서 창동도 시나브로 퇴락해갔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문화 예술인들은,
창동을 재건하여 예전 이름을 되살리고 관광객을 유치하려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안다.
문예 특성화 구역으로 만들고자 거리거리마다 벽화를 그리고,
토속 문화와 관련한 업소를 배치하는 한편 시선을 끌 만한
예술적 구조물을 설치하는 등 온갖 치장을 한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함마창 삼인방?'이
창동 골목골목을 누벼본 느낌은 매우 썰렁했다.
한때 성업하던 가게들은 공실이 된 지 오래고
건물 임대 딱지는 덕지덕지 온 데 나붙어 있었다.
어떤 골목은 폐가들이 흉물처럼 방치되어
괴담 영화 촬영지로 활용해도 될 만큼 몰락해 버렸다.
공 들인 노력에 비해 결실은 무참할 정도로 비관적이었다.
창동의 흥망성쇠는 그렇다 치고,
골목에 들어설 초입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유별한 3층 건물을 만났다. 반세기 전 추억 두어 개도
지체 없이 딸려 나왔다. 탄성을 질렀다.
아니 탄성이 아니라, 모종의 미련인지 아니면 헛헛한 아쉬움이 밴
깊은 탄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74년, 위 건물 2,3층은 '마산 R-TV 학원'이었다.
고교 졸업 후 손쉬운 취업을 위해 얼마간 저 학원을 다녔다.
수업 중 쉬는 시간마다 나는 2층 창문을 통해 맞은편 건물을 보았다.
좀 더 좁혀 말하면, 맞은편 건물 2층에서 일하는 여자애를 본 것이다.
1층은 고급 의상실 매장이었고, 2층은 옷감을 마름질하고 재봉하는
이른바 옷 만드는 공장이었다.
나와 또래이거나 한두 살 아래로 보이는 앳된 여자애였다.
아마 허드렛일을 하는 보조역이지 않았나 싶다.
나는 맞은편 건물 창문 안을 자주 기웃거렸다.
그럴 때마다 맞은편에는 그 아이가 보였다.
바닥을 쓸기도 하고 다림질할 때도 있었다.
항상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내가 골똘이 보고 있노라면
그도 이쪽을 바라볼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른 눈을 피했다.
그때의 기분이 어땠을지는, 보통의 성장과정을 거친
남녀라면 어찌 모르겠는가. 심장 박동은 쉼 없이
콩닥거렸을 것이고, 꺼내보진 않았지만 심장 색깔도
더욱 진홍색을 띠었을 것이다.
날이 지날수록 건너편을 훔쳐보는 일이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 당연히 눈길이 마주치는 횟수
또한 늘어났다. 뭐든 자주 하게 되면 면역이 생기고
자연스러워지기 마련이다. 눈길이 맞닿을 때마다,
'알 수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은' 서로의 눈빛이 휘감겼다.
마침내 조그만 웃음도 주고받았다. 볼 때마다 서로
싱긋 미소를 짓곤 했다.
그 아이의 웃음기 머금은 얼굴은 지금도 어제 본 모습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가관이 풍년이지만, 지금 되새겨 봐도
참 아련하고 풋풋한 느낌인 건 숨기고 싶지 않다.
함안, 마산 두 사진 작가님 덕분에 창동 한 바퀴도 잘 돌고,
싱그러운 옛기억도 떠올렸으니 그날은 나에게
오지게 수지맞았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