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년 / 박성우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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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 생물 시간, 영양소와 먹거리 섭취에 대한 수업 진행 중
'인간은 무슨 음식이든 한 가지를 오래 먹으면 싫증이 나고 물린다.'는 선상님 말씀
빤히 올려다보며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하루도 안 빠지고 묵는 밥은 와 안 물리까요?"
두텁고 뻣뻣한 출석부가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리갈겼네
물어서는 안 될 물음인 줄 나야 몰랐지
왜 맞아야 했는지 이유도 모르고 듣지도 못했네
중딩 간덩이가 진화하여 작금에는 북쪽 통수권자도 갈군다더만
그때는 순진했네. 맞을 짓을 했는가 보다,가 반이었고 나머지 반쯤은 억울했을 뿐.
고딩 물리 시간, 운동의 제3법칙을 공부하는 시간
선상님은 히죽거리면서 가벼운 제스처를 더하여 예를 들었지.
출석부의 등을 교탁 바닥에 대고 왼쪽 오른쪽으로 힘 F를 가하여
넘어지는 쪽으로 운동이 작용하는 것을 설명하셨지
평소 생각없이 잘 웃던 놈이 마술사 같은 선생님 손놀림이 사뭇 웃겨서
늘 하던 대로 입도 벌리지 않고 살포시 웃어버렸네
운동의 법칙에 교구로 쓰이던 출석부는 별안간
귀싸대기를 후려갈기는 손바닥으로 바뀌어 버렸네
역시나 왜 맞아야 했는지 이유는 듣지 못했어
반항의 시기였지. 그러나 소심해서 속으로만 씨불거리고 말았네.
고딩 정경 시간, 선생님은 수업에 심취하면
입가에 거품을 물 정도로 열강을 하시는 분이었지.
뒤에 앉은 친구가 장난 끝에 펜촉으로 옆구리를 찔러 버렸네
잉크를 찍어 쓰는 촉은 살짝 찔려도 짜릿한 통증을 느끼게 되지
어뿔싸! 창졸간 입 밖으로 짧은 신음이 튀어 나와 버렸네
이번은 출석부가 아니었어. 살점 없는 메마른 손,
왼뺨은 손바닥으로 오른뺨은 손등으로, 왼쪽 오른쪽
아닌 말로 예배당 종치듯이 얻어걸쳤네
후려치는 힘에 밀려 두어 발짝 뒷걸음쳤다가
때리려면 아나 또 때리이소 하는 오기에
귀싸대기 올려 붙이기 딱 좋은 위치에 다시
곱다시 갖다 대 드리기를 예닐곱 차례
정말 원도 한도 없이 얻어터졌네
반항의 절정기였으나 잘잘못은 구분할 줄 알았지
그래서 헌신적으로 대 드렸고 통쾌하게 두드려 맞았지
이건 순전히 내 잘못이란 걸 스스로 알았어. 그래서
많이 부끄러웠고 선생님에게 말도 못하게 죄송했었지.
일이 그렇게 터질 줄 짐작조차 못했을 친구, 그래서
허벌나게 줘 터진 내게 억수로 미안했을 뒷자리 친구,
송곳도 아니고 기껏 펜촉일 따름이었는데 그걸 못 참고
신음소리를 뱉어 버린 내가 잘못한 거지. 그래서
안절부절 못하는 녀석에겐 오히려 내가 더 미안했었지.
여태 맞아 본 역사를 떠올린다면 그리 화려하지는 않아
서열에 의해 정리되는, 지붕 밑 대세로부터 쥐어박히던 코흘리개 때나
작대기 갯수 따라 패고 맞는 것이 당연하던 군대 시절은 차치하고,
초딩 때 교장 선생의 금쪽같은 아들과 한판 떴을 때, 그리고
고딩 실습 조교인 선배로부터 맞은 '줄빠따'를 빼고는
신체에 가격을 당한 기억이 거의 없을 만큼 나는
나 아닌 세계에 순응하며 살았어.
출석부가 아니고 차라리 정당한 회초리였으면 어땠을까
바짓단 걷어올리게 하고, 무슨 잘못으로 신성한 수업에 훼방을 놓았고
어떤 생마새끼 같은 태도로 선생님의 체면에 똥칠을 하였는지
준엄한 꾸중을 얹어서 종아리를 내리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출석부 갈피에는 육십 개가 넘는 이름이 들어앉아 있었고
그 모든 이름이 총총하게 바라보는 눈망울 앞에서
왜 얻어걸쳐야 하는지 까닭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납득하기 어려운 유린을 당하고, 때아닌 수치심으로 내몰렸을 때,
그저 그런 일로 쳐 버릴 만큼 내 유년기의 숫기는 그리 울창하지 못했어.
자애의 품을 벗어난, 몽둥이의 역할과 자리를 맞바꾼 출석부
볼때기를 향해 서문도 없이 사선으로 달겨들던,
운동의 법칙이 내 뺨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고
운동의 물리적 작용이 어떤 심리적 반작용을 낳는지까지 알게 해주었던,
국방색 겉장의 그 출석부에 얽힌 인간적 모멸감은 아마
기억의 잔주름에 산소 공급이 멈출 때까지 이어지겠지
교육이란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주기 위한' 것인데
무소불위의 지도권을 남용하고 체벌의 오용을 저지르던 교육자
포마드 바른 머릿결 같이 번쩍번쩍 빛나는 그들의 이름
망각의 강으로 끝내 흘러가지 못할 그들의 이름이
기억의 곳간에서 곪다가 곪다가 구더기가 득실댈 때까지
밤하늘 별처럼 죽자고 빛날 것이야.
사람이란 것이 품질이 다 좋을 수만 없어서
이 양반 저 양반 할 것 없이
사람이란 것이 잘못도 할 수 있는 노릇이어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도 별수 없는 판에
하물며 교육자라고 어찌 모두 훌륭할 수 있겠나
선생이라고 모두 잘나기만 하다면
어쩌면 그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닐지도 몰라
잘난 놈도 있으면 못난 놈도 있고
착한 사람이 있으면 개중 나쁜 사람도 있고
참된 스승이 있는 반면 제자보다 못한 선생도 있는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 뭐 별 게 있겠나
라고 생각하면 될 걸 가지고 뭘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