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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Story

막일

by -마당- 2023. 7. 16.

 

나의 밥벌이 이력은, 노무자 삼 할에 기술자 직무가 칠 할이다.
그러니까 몸으로 때우는 일과 머리를 함께 써야 하는 일을 지겹게 했다는 의미다.
이제는 정년을 졸업하고 용돈 벌이 삼아 한 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일한다.
솔직히 말하면 말이 용돈이지 현역 때, 퇴직 후 탱자탱자하며 지낼 만큼
넉넉한 밥벌이를 못한 바람에 그걸 벌충하는 짓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얼마전 모처럼 재밌는 막일을 해 보았다는 썰을 풀려고 서설을 좀 늘어놓았다.

사흘 전 이른 아침 단잠을 깨우는 전화를 받았다.
잠을 즐겨야 할 시간에 오는 전화 치고 반가운 소식이 얼마나 될까.
빗나가면 좋을 예상은 어지간해서 빗나가지 않는 법. 정해진 일 외에 긴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다.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40km 가량 떨어진 논공 단지의 한 업체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장맛비는 오락가락 장단을 맞추었고 출근 시간과 맞물린 국도와 고속도로는
지렁이처럼 늘어선 차들이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예전 같으면 허폐가 뒤집히도록 애를 태우거나 조급증을 냈을 것이다. 

사십여 년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하고 보니 이골이 나서 그런지, 이젠 

어지간히 급해도 자못 여유롭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온 공장이 조용하다. 주된 동력인 전기가 죽어 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이 공장은, 우리 회사와 전기 시설물 위탁 관리 계약을 맺은 곳이다.
찬찬히 살펴보니 전력 공급사로부터 전기를 받는 개폐기가 차단되어 있었다. 
자동 개폐 장치이기 때문에 무언가 차단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현지 직원들은 전기가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알아챌 만한 별다른

조짐이나 징후도 없었다고 한다.
명색 전문가 입장으로 현장에 온 내가 봐도 확실한 맥을 잡기 어려웠다.
단지 한 군데 의심 가는 데가 있긴 했다. 전주 중간에 부착된

개폐기 조작함(컨트롤러)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공장은 섰고 시간이 곧 돈인 사장님의 마음은 급했다.
공장장님 발걸음도 바빴다.
어디를 가나 국룰처럼, 이럴 때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도 꼭 있기 마련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대놓고 그러진 않았지만, 해결책을 빨리 제시하지 않는다고
은근히 압박하 듯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럴 때 필요한 건 '스피드'가 아니다. 전기는 위험하다.
이곳의 공급 전원은 특별 고압이다. 아무리 급해도 신중한 판단과
결단이 어우러져야 하고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이다.

정밀 점검을 해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으면 결국 가압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전기를 살려서 상태를 감시해 보는 것이다. 부담스러운 처치임에는 틀림없다.
전기적 트러블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불꽃이 튀거나 이상음이 들리는 등
원인이 외부로 드러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원인 불명으로 막연히

살릴 수밖에 없을 때는, 통전되는 순간에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문제의 정체가

드러나는 때가 많다. 그 경우라는 것은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중대 사고로

이어지는 수도 있다. 가령 차단기 내부 폭발이나 변압기 소손 등의 예가 그렇다.

그래서 부담스럽다는 얘기다.

전기를 살리려면 자동 차단된 개폐기를 열린 상태에서 닫힌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수동과 자동 조작,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자동은 컨트롤러를 이용하고, 수동은 
개폐기에 달린 전환 레버를 직접 조작해야 한다.
먼저 자동 조작을 해보기로 했다. 컨트롤러는 사람 두 길 정도 높이의 전봇대 중간에

있었다. 그곳은 잡목과 얼기설기 얽힌 덩굴식물로 뒤덮여 있었다. 접근이 어려웠다.

게다가 전주 아랫부분에 벌집이 있어 가까이 다가가면 벌들이 생난리를 쳤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또 내리기 시작했다. 첩첩산중에 점입가경.
벌 소탕 작업이 벌어졌다. 에어로졸 해충 퇴치기와 기다란 막대기가 등장했다.
외국인 현장 근로자들이 동원되었다. 타국에서,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도 모자라
벌 잡는 일까지 나서야 하는,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나름 애를 썼으나, 벌집에 덤벼들다가 벌떼에 쫓겨나기만 반복될 뿐
진전이 없었다. 답답한 풍경을 바라보던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지 마시고 119에 도움을 요청하시지요?”

우리의 믿음, 우리의 파수꾼 119가 출동했다. 젊은 요원 두 명이 왔다.
상황을 파악하고 필요 공구를 챙기고 보호장구를 착용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벌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역시 달랐다.
차분했고 체계적이었고 순서가 정연했다. 커다란 전정가위와 낫으로

순식간에 덤불을 쳐냈다. 그리고 벌집을 떼 내어 비닐봉지에 담아 상황을 종료했다.

아니다. 상황이 끝난 게 아니었다. 벌집은 제거되었으나
집 잃은 벌들은 우왕좌왕했다.

일부는 자기 집을 통째로 파괴시킨 119를 공격했고, 나머지는 갈 곳을 몰라

그 근처를 여전히 붕붕거리며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으로 다가가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벌에 쏘여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아프고 불쾌한지를.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119 청년에게 부탁했다. 보호장구를 좀 빌려줄 수 없냐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보호복을 입는 게 쉽지 않았다. 시간이 꽤 걸렸다.
복장이 우주인 옷같이 고급스럽거나 멋지진 않았지만, 멀찌감치에서 보거나
눈 나쁜 사람이 보면 마치 우주복 걸친 것 같은 모양새는 될 것 같았다.
방진복 경험은 있어도 119 옷은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첫 경험이었다.
환갑 지나 이런 경험을 해 보다니. 벌들에겐 불행인지 몰라도 나는 복이 터졌다.

비는 일방 내리고 고압이 흐르는 전봇대 중간까지 접근해야 하니, 119는
뭔가 불안한가 보았다. 보호복 걸치기 전에 보았던 나의 행색 때문일 것이다.
태반이 넘는 흰머리도 그렇고, 다부져 보이지 않는 왜소한 체구인 데다
지네들 아버지뻘 나이로 보였으니 오죽했을까.
괜찮겠냐며 연신 물었다. 그것도 모자라 조심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먹였다.
심지어, 혹시 모르니 철수하지 않고 옆에 대기하고 있겠다는 말까지 보탰다.
고압에 감전되거나 예기치 않은 2차 사고로, 높은 데서 추락하는 일이
생길 것에 대한 염려였을 것이다. 얼마나 안심이 되지 않으면 저럴까 싶어

속으로 슬몃 웃음이 났다. 어쩌면, 이 노인네가 전기를 좀 알기는 하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는지도 모른다.

플라스틱 팰릿 받침대를 이용하여 작업을 시작했다. 고압 스위치를 조작할 때는

늘 조바심이 따른다. 오랜 전기 밥을 먹으면서 체험했던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하여, 항상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행동에 들어간다.

말이 그렇지, 몸에 있는 촉수란 촉수는 모두 곤두서고 초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이 시점에 할 얘기는 아니지만, 나는 오래전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미 남기는 말을 전해

놓았다. 자칫하면 저쪽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상황을 수시로 맞닥뜨리는 밥벌이기에 그렇다.


On 조작 단추를 눌렀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개폐기 내부 접촉 소리나, 가압에 따른

변압기 진동음도 들리지 않았다. 고압 개폐기가 On 상태로 전환되지 않은 것이다.

설마 했는데 애초 의심했던 부분이 원인일 확률이 높아졌다. 컨트롤러 내부 고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동 조작이 무산되었으니 수동 조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그에 맞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 안전한 위치에서 개폐기의 On/Off 레버를 조작할 수 있는

절연 조작봉이 필요한 것이다. 쓰임새가 드문 도구라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몸담은 회사에서 그것이 와야 후속 조치를 할 수 있었다.

가랑비는 여전히 내렸고 주변은 조용했다. 119 구난 차량이 보이니 지나가는 차들은 

다들 잠시 멈추고, 뭔 일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작봉이 도착했다. 16m 전주 꼭대기에 위치한 개폐기의 조작은 쉽지 않았다.
특고압이 충전된 전선로와 개폐기 조작 레버의 이격 거리는 불과 두어 뼘밖에
되지 않는다. 모든 동작과 조작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조작 레버를 힘껏 잡아 당겼다. 다행히 개폐기는 별다른 트러블 없이 투입되었다.

저압측 전압을 확인하고 배전 계통에 따라 순차적으로 스위치를 올렸다. 공장에

불이 밝혀졌다. 모터 기동하는 소리도 들렸다. 조금만 더 있다 들어오지, 하는

농담조의 볼멘소리도 여기저기서 귓속말처럼 들려왔다. 정전 덕에 때아닌 휴식을

취하게 된 현장 근로자들의 푸념일 것이다. 정전 복구는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었다.

며칠 지난 지금까지 공장에서 숨가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전기는 잘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심증적이었던 원인을 거의 확실한 것으로 판단해도

될 것이다. 근래 잦았던 폭우로 인해, 조작함 내부로 빗물이 침입하여 컨트롤

모듈을  손상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전자 기판은 습기에 매우 취약하다. 그리하여 

원인 모를 Off 신호가 발생하여 개폐기를 오작동시켰을 것으로 결론지었다.

 

오랜만에 막일을 했다. 긴장된 순간도 있었지만 의미 있는 한나절을 선물 받은

날이었다. 생전 처음 해 본 일도 있어 신선한 느낌도 있었다.

흔히 전기를 두고 마치 생명체인 것처럼, 살았느니 죽었다느니 하는 표현을

곧잘 쓴다. 선을 따라 흐르고 있으면 산 것이고 멈춰 있으면 죽은 것이다.

의인화시킨 것도 모자라 심지어 전기를 만진다고도 한다. 따지고 보면 전기는

만져지는 물체가 아니다. 보이지 않고 형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때로 공포로 몰아넣는다. 귀신이 그렇고 전기가 그렇다.

공포는 치명적인 위험이나 죽음이 예견될 때 품는 생각이다. 그래서 전기는

가늠할 수 없는 위험이 잠재된 것이라서 쉬 만지려 들지 않는다. 반면

겁도 없이 전기를 만지작거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이들로부터 별 잘난 것도

없으면서 얼굴을 파는 경우가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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