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한잔 찌뜨렸다.
때로는 기분 좋은 숙취를 느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친구는 펜글씨를 굵직굵직하게 잘 썼다. 잉크병 안에 든 스펀지를 찍어 쓰는데
걸핏하면 손등이나 손가락에 잉크를 까맣게 묻히곤 했다. 그런 시시콜콜한
몇 가지 기억만 남기고 타 도시로 전학해 버렸다. 중학교 1학년, 그것도 한 한기를
보냈을까 말까 한 기간에, 둘이 어떤 교감을 나눴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후로
꽤 오래 편지를 주고받았지 싶다. 그러다 각자도생의 이런저런 연유로 소식이 끊겼었다.
“박OO씨? 혹시 박OO씨 맞습니까?”
뉴 밀레니엄을 갓 맞았을 즈음 한 날,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전화를 받았다. 그였다.
인연이란 참 공교로운 것이다. 친구의 친구 중 한 친구의 아내가 내 초등학교
동기였던 것이다. 그들은 부부 동반 모임을 가끔 가졌다는데 서로의 고향 동네를
들먹이는 일이 있었고, 친구는 용케 내가 자란 면 단위의 지역명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았다. 이십 년이 지난 후의 해후가 이루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약삭빠른 구석이 있다. 친구의 면면을 훑었다. 강산이 두 번쯤
변할 동안 친구가 세월을 어떻게 거쳤는지 살폈다. 그즈음 나는 사람의 관계에 부정적
시선이 태반을 넘었고 내 정서와 잘 섞일 수 없는 인연은 아예 맺지 않기로 작정한
터였다. 하지만 그를 거쳐간 세월은 고왔고, 고맙게도 그는 진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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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흘리개 시절은 사뭇 지난 것 같고
열에 아홉은 까까 중머리
예닐곱만 넘어도 내외하던 시절이라
여식애 반 머슴애 반, 반 가르기 했나 보네.
다들 어디에서 무엇 하고 사는지
어르신들 말씀대로라면
제 먹을 것 다 가지고 난다던 시절에 생겨났으니
제각기 앞가림은 잘 하고들 있겠제.
나는 누구고 너는 누구인가? 왜 태어났고,
뭐 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단지 노는 것은 하늘 대왕국이고
망가책 제하고 책이란 책은 지독스레 보기 싫던
그 시절 혹시 자네 아니던가?
여름 방학 이맘 때면
반딧불이 쫓느라 밤늦게 싸다니다가
축담 밑 평상에 어무이 무릎을 베개 삼아 누우면
휘이 휘이, 모기도 훝차내고
더위도 쫒아내는 쉼 없는 손부채질에
세근 없는 자식놈의 숨소리는 잦아들고
짧은 여름밤이 얼마나 지났을까?
"퍼뜩 일어나서 소몰고 산에 안 갈끼가?"
새벽녘 꿀잠 깨우는 아부지의 아련한 소리에
굼벵이처럼 몸을 이리 말고 저리 말고 하다가
어무이 부지깽이가 똥꾸녕을 후빌라치면
천근만근 같은 눈 비비고 일어났지.
졸음이 채 가시지 않아 눈꺼풀은 반쯤 닫혔고
연신 하품을 해 제치며 소 몰고 삽짝을 나서면
총중에 부지런한 놈은 망태기 어깨에 메고
쇠똥 거름 줍느라 바지런히 움직였고,
비몽사몽 소에 이끌려 뒷산에 다다르면
온 동네 소란 소는 다 모여 우시장이 방불했지.
무심결에 산 아래를 뒤돌아 보면
가가호호 밥 짓는 연기가 안개처럼 자우룩.
소 볼기짝 가분다리 떼어 땅바닥에 때기질 치고
소고삐 갈 지 자로 뿔에 칭칭 동여 감으면
소들은 제 알아서 꼴 뜯으러 산으로 흩어졌제.
참새미 얼음 같은 물에 토끼처럼 세수도 하고
망개 이파리 국자로 접어 몇 모금 목도 축이고
시장한 뱃구레 달래며 털레털레 집으로 오면
그때까지도 해는 동천에 걸릴동 말동.
고매 쭐구지 참박국에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OO야~ 멱감으러 가자." 친구놈들 채근질에
빵꾸 난 빤쭈 위에 물려받은 반바지 걸치고
걸빵 난닝구 한 장, 타이야표 깜장 고무신에
집 나서는 마음은 왜 그리 바쁘던지.
어제 분질러 둬서 풀죽은 쑥 잎사귀를
소캐같이 돌돌 말아 귓구녕에 침발라 넣고
한달음에 널찍한 보또랑 둑에 올라서자마자
부끄럼마저 던져 버린 발가벗은 일렬 횡대로
한 손으로 고추 가리고 한 손으론 코 틀어막은 채
니가 잘하나 내가 잘하나 멋들어지게 싸카다치하던
그 시절 바로 그 녀석이 아니던가?
.............. 下略
<두 번째 줄 세 번째 녀석> 부분.
그는 일찍이 동창의 친목을 돕기 위해, ‘나모’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초딩 동기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곳은 친구와, 나와 일면식도 없는 그의 친구들이 노는 공간이었다.
앨범 게시판에는 어릴 때 찍은 흑백 사진들도 있었는데, 눈치가 없었는지 오지랖이
넓었는지, 친구가 끼어 있는 사진을 보고, 하도 반가워 개발새발 글을 써 친구 홈
‘자게’에 덜렁 올렸더랬다. 그러고 보면 말도 아니고 방귀도 아닌 저 글은, 말을 글로
바꾸어 인터넷에 긁적거린 내 최초의 떠벌임이었다.
그러구러 20여 년이 또 흘렀다.
나는 친구를 본보기로 삼을 때가 많다. 범상하지 않은, 친구 이상의 존재로 보일 때가
잦기 때문이다. 이태 전만 해도 그렇다. 첫 번째 버킷 목록을 실천하기 위해 배낭 하나
둘러메고 무작정 길을 떴을 때였다. 대문을 나선 지 사흘째 되던 날, 해운대 동백섬
주차장에서 비박을 하고 새벽에 친구를 만났다. 그곳을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일광
해수욕장까지 30여km를 같이 걸었다. 전날 밤 내가 걷기로 작정한 여정을 듣더니,
하루 정도는 동반 걷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더란다. 예기치 못한 감동을 바가지에
담아 내 머리에 쏟아붓는 괘씸한 짓이 아니고 무엇이라 말할까.
친구는 늘 나보다 몇 걸음 앞서간다. 홈피에 친구들의 들락거림이 눈에 띄게
줄어들자, 접근하기 쉬운 동기회 유튜브를 개설하여 꼬치친구들의 친목을
돕고 있다. 어제도 나는 습관처럼 그들의 동영상 채널에 접속하여 그와 동기들의
거동을 살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친구 목소리를 듣고자 전화를 했다.
“잘 지내제?”
“하모, 그란데 친구야, 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우예 알고 전화했노?”
절묘한 타이밍. 문상을 위해 친구는 우리 도시의 어느 장례식장에 와 있었다.
부리나케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문상을 마친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친구를 빼돌렸다. 그리고 둘이서 펐다. 근 일 년넘어 가진 술자리였다. 어찌
숙취가 없을 수 있겠는가.
친구를 만나면 늘 그렇지만, 어제도 인품이란 낱말을 오랜만에 떠올린 날이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친구에게 전화질을 한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은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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