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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Story

실수

by -마당- 2023. 8. 24.

 

큰 실수를 했다.

내가 좀 침소봉대하고 호들갑스러운 면이 있다는 건 안다.

그렇다 해도 '큰 실수'라는 전제는 그리 크게 부풀리지 않은 표현이다.

 

달포 전부터 아내로부터 부탁 받은 게 있었다.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취미로 배우는 과정이 있는데

올 하반기 과정도 계속해야 하니 나더러 접수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 이르고 접수 개시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나절 느지막이 일어나 하는 일 없이 꿈지럭대다가

낄낄거리며 누군가와 SNS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예? 도서관 하반기 수업 신청했습니꺼?"

 

거실에서 아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부르는 호칭은,

오빠도 아니고, 여보도 아니고 성조가 있는 중국어처럼,

뒤를 길고 높게 빼는 '예~~?'다.

뭔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하고 귓등으로 흘리려다가 일순

몇 올 남지 않은 정수리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읭, 뭐라카노, 그게 오늘이었소? 맞나? 그게 오늘이었나? 오늘 몇 신데?"

 

당황한 나머지 더듬거리며 와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일방 접어 두었던

침대 테이블을 펼치며 노트북을 갖다 올리고 부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10시 아입니꺼. 그라마 아직 신청도 안 했단 말입니꺼?"

 

목소리에 벌써 짜증 반 핀잔 반이 섞여 있다.

컴퓨터 시계는 이미 오전 10:14가 찍혀 있었다.

부리나케 도서관 웹사이트에 접속하여, 프로그램 신청 배너로 들어가

'전통민화' 과정을 클릭하니...... 띠잉~ '모집 완료'

 

4분만에 품절되었다.

이건 뭐 이름난 연주회나 유명 가수의 콘서트 티켓팅도 아니고,

창원사랑 제로페이 쿠폰이나 백화점의 개점 질주도 아니면서

무슨 경쟁이 이리 치열하단 말인가.

민화를 배워 개인전을 열거나 작품을 팔기 위한 고급 과정도 아니고,

남는 시간에 취미 삼아 배우려는 과정인데 이리 목을 맨단 말인가.

 

 

 

 

아내가 몸소 부탁한 것 중, 실행 가능한 것을 실행하지 못한 것은

이번을 포함하여 씻고 벗고 딱 두 번이다.

1980년대 온 세상에 아파트 바람이 불었을 때, 자기 대신

분양 신청 줄을 서 달라 해서 일고여덟 시간 줄 서 있다가

도저히 못하겠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술친구 불러내

퍼마시러 갔을 때가 한 번이었고, 신청 시간을 깜박하여

접수 실패한 이번의 경우가 두 번째다.

그러니 ‘큰 실수’라는 말이 어찌 어울리지 않겠나.

 

나는 아내의 부탁을, 전쟁터에서 진두지휘하는

장군의 지상 명령만큼이나 떠받드는 사람이다.

물론 예전에는 안 그랬다. 내가 실수 좀 했기로서니

뭐라고 다그치려 들면 맞불을 놓았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 살면 옳지 않다는 것을,

딱 한 갑자를 살고 나서야 체득했다. 나의 드높던 기상은

사나운 불독 만난 똥개의 꼬리처럼 사타구니에 기어든 지 꽤 됐다.

다소 늦긴 했지만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아내의 하명을 묵살하거나 항명하는 그런 만용은 앞으로

절대 부리지 않으리라 맹세하는 바다.

 

“오데 신경을 쓴다고 마누라 일은 안중에도 없고...”

 

유감스럽게도 아내의 뒤끝은 장난이 없다.

내 실수에 대한 심판은 아점 밥상머리에서 여지없이 감행되었다.

지난 두어 시즌 민화를 열심히 배우는가 싶더니

이번 신청에서 등록을 못하게 되어 많이 속상한가 보았다.

오죽 열이 받았으면, 정오도 지나지 않은 시각에,

며칠 전 종형님 제삿날 싸 온 음식으로 잡탕 찌개를 만들어

막걸리까지 펼쳐 놓았다.

 

“마누라가 1번이라야 되는 거 아입니꺼? 나는 도대체

당신한테 몇 번쨉니꺼? 등수에 들기는 합니꺼? 그리

신신당부했는데 그래 까물 걸 까 무야지 그걸 까뭇다는 기

말이 됩니꺼?”

 

밥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는데 졸지에 개보다

못한 신세가 되었다. 온갖 첨단 기술이 집약된 스마트폰

일정 어플에 알림 설정만 해놓았더라도 되었는데 그것조차

하지 않았으니 아무리 더한 꾸지람을 들어도 오지 싸다 싶다.

 

“하반기에 그리려고 화선지에 조렇게 본까지 떠 놨는데

우얄 낍니꺼?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 부탁이었으면

천없는 일이 있어도 기억했겠지예?”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은 딱 이럴 때 쓰일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도 복장에서 목구멍으로 치미는 말이 왜 없을까?

 

‘그라마, 당신은 잘한 기 뭐가 있소? 그렇게 중요한 신청이라면

자주 기억을 떠올렸다가 나한테 일러 줘야지, 안 그래도

나이 먹고 까묵는 기 천지삐까린데, 내가 오데 신이라 카더나.

오만 거 다 기억하그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제 할 말은 다 있다.

안사람 잔소리가 심해지면 속으로 고이는 생각도 많아지는 법.

 

‘아니 간밤에 잠 좀 자그로 다리 좀 주물러 달라 캤을 때, 그때

종아리고 발뒤꿈치고 오데고 간에 조물조물 주무르면서

영접시키려고 애쓸 때 그때 귀띔이라도 한번 해주지.

자라는 잠은 안 자고 키득거리면서 유튜브 볼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나한테만 말큼 덮어씌우면 우짜자는 말인공?

자기는 에고패고 정신 놓고 있다가 나만 족치면 그만인강?’

 

말이라 해서 다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항상 후환을 생각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래야 낭패를 당하지 않는다. 이 정도 이치는 벌써 깨달았다.

아내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것보다 어떤 대안을 생각하는 게 현명한 것이다.

 

여러 방도를 검토했다. 전통 민화 대신 다른 과정을

공부하면 어떨지, 아예 아무 과정도 하지 말고 올 하반기는

남편과 노닥거리며 좀 쉬어 가는 것은 어떨지 등 꽤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혹시나 하고 접수 담당자에게

문의하니 실낱같은 희망이 비쳤다. 그리고 그 바람은 운 좋게도

오늘을 넘기지 않고 이루어졌다. 아래와 같이.

 

아내로부터 따가운 눈총과 꾸중을 듣던 아점 시간,

잔소리를 듣고 또 듣다가 보니 감히 대꾸는 할 수 없지만

부르르 손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급기야

젓가락으로 집어 오던 고매쭐구지짐치 한 가닥을 막걸리 잔에

빠뜨리는 불상사가 생겼다. 치사하고 앵꼬워서 술맛이고 밥맛이고

다 떨어져 슬그머니 밥상을 벗어났다.

그때부터 노트북 앞에 궁디를 깔고 앉아 도서관 민화 신청

페이지를 열어 놓고 시시각각 '새로 고침'를 해댔다.

그럴 때마다 ‘모집 완료’ 메시지를 봐야 했다. 아마 몇십 번은

봤을 것이다. 그러다 오후 네 시가 임박할 즈음 ‘모집 중’이란

버튼이 활성화되었다.

 

야구에도 대타가 있고 아파트 분양에도 대기 번호가

있지 않던가. 먼저 등록한 사람 중에서 여하한 사유로

한 사람이 신청 취소를 한 것이다.

나는 사막여우처럼 매복하여 새로 고침을 죽자고

해댄 끝에 한 마리의 전갈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낼름 주워 먹었다.

 

이건 쾌거였다. 죽자고 새로 고침을 해대다가, '모집 중'이란

글자를 보자마자 신청 절차를 밟았고, 상태 표시에 ‘신청완료’라는

글자를 확인하자마자 그때부터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세게, 얼마나 신나게 박수를 쳐댔는지

손바닥이 얼얼했다. 그 시간 이후로 내가 아내에게 보인 언행은

차마 속보여 낱낱이 드러내지 못하겠다. 나는 내가 해낸 것이

별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공치사 만큼은 아주 거하게 하는

푼수기가 있다는 것만 밝히고 여기서 접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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