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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소리

자랑도 가지가지

by -마당- 2023. 10. 1.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배추 솎는 일을 같이 하자는 거였다.

내키지 않아도 빼박 갈 수밖에 없는 처지라

일복 차림을 단디하고 나섰다.

 

올해 담글 김장 배추가 쑥쑥 자라고 있었다.

이 열 종대로 심겨진 배추밭의 한 줄은

맛있는 김치가 되어 우리 가족 입으로 들어갈 것이다.

내 입에 들어갈 먹을 거리가, 우리 밭도 아닌

남의 땅에서 잘 크고 있는 것이다.

인심 좋은 지인의 은혜로운 선물인데

어찌 부름에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배추 파종을 일부러 쏘물게 하는 것은,

중간중간 솎아 생절이를 하든지 우거지국을

끓여 먹으려는 구구다.

지인은 솎음을 하고 나는 솎아 내는 족족 씻었다.

적어도 다섯 번은 씻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는 한 번 뽑아 던져주면 끝이고, 나는

다섯 번을 씻꺼 조져야 한다는 데 이르자 

실그머니 심사가 틀렸다. 그래서 따졌다.

 

"미친이 아아를 씻꺼 직인다 카더마는 

물에 담갔다 그냥 들내는 것도 아니고,

서답 헹구드끼 쥐흔들어야 하는데

자아이 배추 이파리가 살아남겄다.

마 두어 번만 헹가도 되겠구마는 만다꼬

다섯 번씩이나 씻어야 하는공?"

 

내 너스레를 들은 지인의 표정이 묘했다.

눈으로 욕을 퍼붓는 것 같았다.

'아이고 잉간아. 말라꼬 사노. 세 끼 밥이 아깝다.'는

표정에서 한 치도 모자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는 촌에서 컸지만, 웃사람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만 했을 뿐이지 농사를 우예 짓는지 잘 모른다.

그러니까 거두는 것도, 어떻게 갈무리하여

우째 보관하는지 등등은 내 알 바 아니었다.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었다.

그러니 솎은 배추를 왜 여러번 헹궈야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지인 말로는, 두세 번 씻어서는 배추속대에

배인 흙이나 티끌이 다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그랬다. 모가지를 잡고 댓 번 흔들어 헹궜는데도

양은 다라이 바닥에 자잘한 부스러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참고로, 저 솎은 배추는 말큼 우리 집으로 옮겨져

즈그마이 손에 먹을 것들로 둔갑할 것들이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

생겨났는지 모를 일이다.

 

대충 일을 마쳤는가 했는데, 지인은

이런 저런 봉다리들을 트렁크가 비좁도록 쑤셔넣었다.

밭에서는 처리가 힘들어, 쓰레기 분리 수거날

청소차에 실어 보내달라는 물건들인 줄 알았다.

집에 와서 봉지들을 부라 보니 이건 뭐

친정 나들이한 딸내미한테 싸 보낸 것도 아니고...

두어 시간 솎은 배추만 씻었을 뿐인데

내가 뭐가 곱다꼬 이리 싸 넣었는지 원...

아무튼 완전 땡 잡고도 줄이가 남은 날이었다.

 

 

조생종 태추감에(태추 감은 다 익어도 시퍼러둥둥한데 식감이 말도 몬하게 부드러움)

마늘에, 말 머시기만한 가지에, 다듬어진 쪽파에, 솎은 무청에,

라면 끼리 물 때 몇 토막 썰어 넣으면 궁물이 엄청시리 시원한 대파에,

그날 내가 투덜거리며 솎은 배추에, 옻닭 해 무라꼬 참옻 한 박스에,

맞다, 뒤에 숨어서 안 보이서 그렇지, 갈치 넣고 째지 무모 좋을 애호박에...

 

나는 복도 복도 지지리도 많은 기라.

복이 너무 넘쳐나서 처치 곤란인기라.

너무 호들갑떨면 오던 복이 달날지도 몰라

이짬치서 자랑은 시톱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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