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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소리

과거 운(科擧 運)

by -마당- 2024. 2. 20.

 

 

 

국민학교 때, 맘 다잡고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데 도방에 있는

중학교 시험에 덜컥 붙는 불상사가 생겼다. 소 뒷걸음치다 쥐잡는

꼴이 된 셈인데, 이를 두고 부모님은 욕봤다,라는 격려 대신,

"니는 과개 운이 좋다 카더라."는 말씀으로 대신하였다.

 

고등학교는, 줄만 서면 들어간다는 땜쟁이 학교를 지원했는데,

과개 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우옛기나 별 어려움 없이 들어가기는 했다.

공업계를 다니다 보면, 전공 관련 이런 저런 자격증 시험이 많다. 물론

먹고 사는 데 자유로운 은수저 이상 쯤은 그런 시험 안 쳐도 별 문제 없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기를 쓰고 쯩을 따야 했다. 또 우이 됐기나,

어무이 아부지 말씀대로 과개 운이 있어 그랬는지 우쨌는지 몰라도,

스물 중반까지 한 타스는 되지 싶을 벼라별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런데 '과거'라는 건, 옛날에 입신양명이나 출세 가도를 달리기 위한

엄청 어려운 시험 제도가 아니었던가. 그에 비해 잘난 기술자격증 시험

따위를 두고 '과개 운' 운운한다는 것은, 한편 서글픈 측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내게 과개 운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시험이든 하찮은 시험이든 

이마빼기에 수건 짜매고 열심히 들이파지 않아도 희한하게 철썩철썩

들러 붙는 재수가 따른다는 그런 의미다.

 

요 근래 며칠 도서관이란 델 가서 궁디 못을 좀 박았다. 그리고 어제

이우지에 있는 부산에 가서 시험이란 것을 봤다. 늘그막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레 시험을 본 까닭은, 입에 풀칠은 해야 하는 입장에서 기왕이면

좀 탱자탱자하며 손쉽게 밥벌이를 하면 우떨까 하는 욕심에 일을 벌인 것이다. 

이 시험에 붙으면, 산불감시요원처럼(산불감시 종사자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음) 나이 들어도, 돈도 몇 푼 벌고 소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엄두를 내본 것이었다.

 

이번 시험은 신생 업종과 관련하여 기획된 자격증이라 아직 한 번도 시행한

적이 없는 첫 시험이었다. 그러니 출제 경향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단지

시행 기관에서 전자문서 파일로 제공한 몇 백페이지의 교재를 참고로

막무가내식 벼락치기 공부를 하여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도대체 얼마만의 시험인가. (아, 아니구나.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보험 드는

셈 치고 즈그마이캉 함께 취득한, 운전면허증 시험 수준과 비슷한 요양보호사 

시험을 보기는 했네.)

고사장에 들어서니 감독관이 무려 4명이나 되었다. 무다이 쫄렸다. 시험장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컴퓨터로 치르는 시험도 난생 처음이다.

시작 종이 울렸다. 모니터라는 시험 지면을 통해 시험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서버로 입장했다.

 

사지선다형 객관식 20점, 서술 필답형 80점이란 걸, 시험 문제를 열어젖히고서야

알았다. 시험 요강을 벌로봤던 것인데, 시험 준비하는 자세가 영 글러먹었다는

얘기다. 이건 뭐 보나마나 불합격은 따놓은 당상이지만, 후회하기도 늦었고 또

시험을 치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1점짜리 객관식 문제 몇 개를 풀고 있는데, 뒤에 앉은 수험생 한 명이 감독관에게

질문하는 소리가 찌릿하게 귀청을 파고 들었다.

 

"저기요, 몇 번 문제 OO에 대해서 논하시오,라는게 있는데요..."

 

으잉? 논하라? 논하라,라니. 단답형 주관식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마 필답형 문제의 난이도가 높게 출제된 모양이었다.

이를 어쩌나, 이거 낭팰세...

풀던 객관식 문제를 집어던지고 서술형 문제로 건너 뛰었다. 문항의 점수가

높은 주관식에 먼저 치중하고, 사지선다형은 연필을 굴리더라도 나중에

푸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아서였다. 

 

그야말로 눈빛이 종이를 뚫을 듯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문제를 푸는데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괴발개발 쓰는 둥 마는 둥하는데 시간은 야속하게 AMG 성능의

바퀴처럼 빨랐다. 나중에는 제쳐놓은 객관식 문제를 거들떠 볼 시간도 부족했다.

최선인지 최선 쯤인지 물라도 우옛거나 기력을 다해 서술하고 마킹을 했다.

초읽기에 몰리면서 허둥지둥 시험을 마치고 '제출'이란 버튼을 누르니, 거참,

'풀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도 제출하시겠습니까?'란 팝업이 친절하게

안내를 한다. 낙망은 이미 시험 시작하자마자 했으니 일말의  미련도 없이  '예'를

눌렀다.

 

로그아웃 하기 전에 응시 화면으로 다시 들어가보니, 아이쿠!  그단새 평가가

끝났는지 시험 결과가 떠 있었다. 두둥~ '불합격'

컴퓨터 시험이라 역시 채점도 빠르구나 하고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려는 찰나,

성능이 그리 좋지 않은 뇌세포가 부지런히 움직이는가 싶더니 야릇한 의구심

하나를 출력시켰다. 대표 감독관에게 살째기 다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혹시... 채점을 전산으로 하는가요, 아니면 인력으로 하는지..."

감독관 답변은 짧았다.

"사람이 하지요. 서술형인데 기계가 우째 합니까?"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사람이 한다면 시험 끝난 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불합격을 띄우다니... 재차 물었다.

"그런데 제 시험 결과가 불합격으로 나오는데 어찌된 일..."

답변은 명쾌했다.

"하핫, 그거 신경쓰지 마이소. 본래 그게 정상입니다. 합격 발표 나기 전에는

으레 불합격으로 표시 되게 되어 있습니다."

 

고사장 7층에서 승강기를 타고 내려옴시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짜장

웃기는 짬뽕이었다. 그 '불합격'이 설령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안심하거나

희망을 가질 모티~가 없을 만큼 시험을 조진 판국에 안도의 한숨을 쉬다니,

도대체 제정신이란 말인가.

 

그렇다. 나는 돌지 않았다. 여태 시험 때마다 그래 왔듯 은근한 기대를 가지게

하는 마약 같은 것. 

.......... 바로 과개 운!

시험에 붙었다고 뻐기거나 교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는지 아니면 긍정적

마인드에서 빚어진 말씀인지 몰라도, 이 시점에 그 운에 넌지시 기대고 싶은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난 것이다.

시험 준비는 올바로 하지 않고 요행만 바라는 모양이 쭈굴시럽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과개 운이라는 지푸라기가 부디 썩은 동아줄 같이 허무하게 끊어지지 않기를

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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