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장부 / 임보
참외밭에 들어가 서리 한번 못 해 보고
마음속 사람 꾀어 보리밭도 못 가 보고
식구들 툴툴 털고서 가출 한번 못 해 보고
팔도 잡놈들과 놀음 한판 못 붙어 보고
골프채 휘두르며 협잡질도 못 해 보고
순진한 양민들 속여 금배지도 못 달아 보고
고을이 떠들썩하게 싸움 한 판 못 해 보고
천하가 뒤뚱거리게 돈 한번 못 벌어보고
그 주제 세상 뒤집을 큰 혁명을 꿈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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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장부가 하고 싶은 게 많은 건지
하고 싶은 걸 못 해서 졸장부인지
못 해 본 것 낱낱이 들추는 모양이
못 해 본 것 해 보고 싶다는 건지
못 해 본 게 다행이라는 건지
행간의 기색으로 알기 어렵다.
서리, 보리밭, 가출, 놀음, 협잡, 씨뤠기, 싸움, 돈.
늘어놓고 보니
대체로 대장부가 나설 것들은 아니다.
나는 내가 졸장부인지 뭔지 아직도 가늠을 못한다.
졸장부의 개념조차 잘 모른다.
단지 나는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룬 건 확실하다.
나는 삶의 지향점을 내 그릇에 맞게 잡았다.
내 삶의 목표는,
'가족과 함께 도시락 싸서 소풍가는 것'이었다.
앉기 편하고 음식 펼치기 좋은 비닐 돗자리 하나 장만하여
공기 좋은 아무 데라도 가서 식구끼리 밥 먹고 돌아오는 것. 그것이었다.
그 목표를 세운 때는 빡빡머리 고딩 시절이었다.
대통령이나 재벌, 별 네 개 장군같이, 성취하기 어려운 꿈은 꾸지 않았다.
나라를 구하려거나 애국자가 되려거나 지구인을 위해 봉사하려는
꿈 같은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내게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건 너무나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후로 나는 이 꿈을 향해 살았다. 어찌 보면 별나지 않고
아주 소박한 꿈으로 비칠 수 있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남들이 거대한 인생 목표를 세워 전력을 다해 매진하는 것과 다름없이
나도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나름 열심히 살았다.
이 꿈을 이루는 것이 나에게는 힘든 도전이었다.
이런 삶을 추구하려면, 가장 먼저 내 꿈에 동의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 아이를 한둘 두려면 부부간 금슬도 좋아야 하고, 소풍을 가려면
기분좋게 나설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려면 빚 없는 살림에
콧구멍만한 집이라도 있어야 한결 편안한 소풍을 할 수 있지 않겠나.
말이 쉽지 이 조건들을 성사시키려면 여간 어렵지 않다. 내 기준으로.
이 어려운 것들을 나는 해냈다. 내 기준으로.
그래서 나는 꿈을 이룬 사람이다. 내 기준으로.
졸장부, 대장부?
소시민 나에게는 쓰잘데없이 공허한 낱말이다.
글을 긁어 놓고 보니, 그렇다.
삶의 지향점에 도달도 했겠다.
즐기기만 하면 될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될 것을.
작금의 소가지에서 굴러다니는
욕심들은 또 무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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