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군소리

똥배 수난

by -마당- 2023. 10. 12.

 

 

 

 

내둥 방에서 꿈지럭거리다가 출출하여 거실로 나갔다.

TV에서는 체험 예능인가 뭔가 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요즘은 TV고 유튜브고 간에 그게 그거 같고, 그 중에도

먹는 방송이 왜 이리 많은지, 시절이 하 수상하다 못해 개떡만도 못하니

저런 것에나 눈길을 주는 건지...

 

거실의 TV가 켜져 있는 시간은 즈그마이가 집에 머무는 시간과 얼추 비슷하다.

얼마 전, 아는 분의 한 마디 말에 뿜을 뻔한 적이 있었다. 듣자 마자 번개 같이

소환되는 장면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분 왈,

"우리 할마씨는 영판 늙은 애벌레 같다 카이. TV 앞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그렇다고 즈그마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우리 집은 그냥 우아한 굼벵이...

 

TV 화면에, 출연자 하나가 뭔가 썰고 있었다.

한 운동 하는 예능인들만 섭외하였는가 본데, 하나같이 힘이 넘쳐나는 눔들이었다.

써그덕 써그덕 칼질을 하는데 뭔가 개운치 않았다. 내가 한 마디 거들었다.

 

"저눔은 쓸 줄 아는 기 힘밖에 없는 갑네. 칼질을 와저래 하노?"

즈그마이가 받는다.

 

"내 눈에는 잘만 썰그마는..."

내우지간에 말이 연이어 오갔다.

 

"참나, 저게 잘만 써는 거 같이 보이요? 당신은 눈도 없나?"

"저마이만 썰모 칼질 잘하는 기제 더 우예 잘하노?"

"자아 하는 거 보소. 칼질 하는 기 위에서 쎄리 누르기만 한다 아이요. 심으로.

 칼질은 어슷하게 심줘서 앞으로 밀 듯 썽글어야지. 저게 양배추가 아니고

돼지괴기 겉으모 저리 썩뚝썩뚝 썰리겠소?"

 

내 말에 나를 치켜 보는 즈그마이 눈이 쪼매 찢어진 것 같았다.

 

"그러이끼네 당신 아랫배가 아아 밴 것 같이 튀 나왔다 아입니꺼."

 

이게 무신 뜬금없는 말인가.

 

"아니, 칼질 하는 이야기허다가 죄 없는 내 배 얘기는 만다꼬 하요?"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예? 밖에 나가 운동할 생각은 도통 안 하고, 집에서

설거지나 할라 쿠고 우예 칼질을 하모 잘 썰릴 낀공 그런 기나 궁리하고,

때때마다 술이나 마실라 카고.... 고래 지내니 우예 배가 안 나오겄어예?

지발 쫌 꿈직이고 사이소. 참말로."

 

아, 스토리가 그리 튈 줄 몰랐다. 즈그마이 입장에서 보면 절묘하기도 하고

내 입장에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할 치명타였다. 완전 꼬랑지 내리고 말았다.

 

이러구러 저녁때가 되어 아슬랑아슬랑 또 거실로 나갔다.

주방에서 나는 꼬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억수로 맛있는 냄새였다.

즈그마이 손에 쥐인 프라이팬에는 여러가지 재료가 섞인 밥이 볶이고 있었다.

나무 주걱으로 들쑤시는 동작이 재밌어 보였다. 구미가 당겼다.

 

"비키 보소. 팔 아푸 낀데 내가 도와 주께."

"마 됐심더. 또 온 데 흐치고 부섴 엉망진창으로 만들라꼬. 마 저리 가이소."

"에헤, 보이끼네 힘들어 보이는구마. 내가 해준다 카이끼네."

"이런 기나 해볼라 카지 말고 밖에 나가 운동이나 하고 오이소. 그 배를

우얄낍니꺼?"

"마 내 배는 지가 들어갈 때 되모 다 알아서 들어가요. 봅시다. 내가 볶아 보께."

 

결국 나는 프라이팬을 빼뜰어 주걱으로 밥알들을 눌러붙이기 시작했다.

닭갈비 집에서 건더기 다 건져먹고 난 국물에 밥 볶듯이 쎄리 눌러 펼쳤다.

근데 이게 쉽지가 않았다. 음식점처럼 팬이 크지도 않지, 볶는 밥은 많지,

프라이팬 입술 너머로 넘쳐 주방 바닥이 슬슬 어질러지기 시작했다.

분명 즈그마이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오지 않을 터... 빠져나갈 방도를 찾아야 했다.

 

즈그마이는 손이 크다. 먹는 데 포원이 졌는지 커도 좀 많이 크다. 수십 년을

살면서 음식이 부족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 먹고 남은 음식이, 나락 털고

나오는 북데기보다 많을 때가 허다하다.

 

"어요, 밥이 와 이리 많소. 너무 많으이끼네 잘 볶이질 않구마."

"그기 뭐 많다고 그랍니꺼. 할 줄 모른단 소리는 안 하고."

"아니, 이기 안 많다꼬? 옆집 사랍 다 불러 먹여도 되겠구마는."

"마 씰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리 나오이소. 내가 할끼끼네." 

"이러이끼네 내 배가 나오지, 달리 나오요? 다 당신 탓이지."

"아니, 볶음밥하고 당신 배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꼬 그랍니꺼?"

 

기다렸다는 듯 나는 만삭같은 내 배를 퉁퉁 치며 받았다.

 

"우예 관계가 없노. 당신이 손이 크이끼네 이렇지. 밥을 이래

마이 볶으모 누가 다 먹소. 당신은 배 부르모 천 없는 일이 있어도

숟가락 놔뿌제. 그람 남는 거는 다 내 차지 아이요. 오데 

내 말이 틀맀나?"

  

내 뒤끝이 작렬했다. 속이 시원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그리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마 말 겉지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마이소. 세상에 젤 미련한 기

배가 부른데도 퍼먹는 기라 캤습니더. 배가 부르모 숟가락을

놔야지 와 꾸역꾸역 먹습니꺼 먹기를. 돼지도 아임시로. 오데

핑계 댈 걸 대야지 기껏 내 손 큰 거 가지고 그랍니꺼, 남자가 추집끄로."

 

깨갱!

사는 게 와 이리 슬프노.

 

 

 

 

 

'군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도 될까?  (6) 2023.11.06
이름 좀 갤차 주이소  (12) 2023.11.04
금목서  (4) 2023.10.09
아까비  (15) 2023.10.09
민들레  (8) 2023.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