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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글/Poem15

졸장부 / 임보 졸장부 / 임보 참외밭에 들어가 서리 한번 못 해 보고 마음속 사람 꾀어 보리밭도 못 가 보고 식구들 툴툴 털고서 가출 한번 못 해 보고 팔도 잡놈들과 놀음 한판 못 붙어 보고 골프채 휘두르며 협잡질도 못 해 보고 순진한 양민들 속여 금배지도 못 달아 보고 고을이 떠들썩하게 싸움 한 판 못 해 보고 천하가 뒤뚱거리게 돈 한번 못 벌어보고 그 주제 세상 뒤집을 큰 혁명을 꿈꾼다고? ------------------------------------------------------------- 졸장부가 하고 싶은 게 많은 건지 하고 싶은 걸 못 해서 졸장부인지 못 해 본 것 낱낱이 들추는 모양이 못 해 본 것 해 보고 싶다는 건지 못 해 본 게 다행이라는 건지 행간의 기색으로 알기 어렵다. 서리, 보리밭, 가.. 2023. 3. 5.
오누이 / 김사인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 2023. 2. 6.
그 변소간의 비밀 / 박규리 그 변소간의 비밀 / 박규리 십년 넘은 그 절 변소간은 그동안 한번도 똥을 푼 적 없다는데요 통을 만들 때 한 구멍 뚫었을거라는 둥 아예 처음부터 밑이 없었다는 둥 말도 많았습니다 변소간을 지은 아랫말 미장이 영감은 벼락 맞을 소리라고 펄펄 뛰지만요, 하여간 그곳은 이상하게 냄새도 안나고 볼일 볼 때 그것이 튀어 엉덩이에 묻는 일도 없었지요 어쨌거나 변소간 근처에 오동나무랑 매실나무가 그 절에서는 가장 눈에 띄게 싯푸르고요 호박이랑 산수유도 유난히 크고 환한 걸 보면요 분명 뭔가 새긴 새는 것이라고 딱한 우리 스님도 남몰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요 누가 알겠어요, 저 변소는 이미 제 가장 깊은 곳에 자기를 버릴 구멍을 스스로 찾았는지도요 막막한 어둠 속에서 더 갈 곳 없는 인생은 스스로 길이 보이기도 하는.. 2023. 1. 3.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수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시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이를 맞으러 벌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환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에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죄도 없는 나뭇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 2022. 12. 29.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 김형영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 김형영 여보게 친구,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마음속의 무심한 미움일랑 꺼내진 말고 사세. 우리도 이젠 중늙은이 파도에 떠밀리는 통나무같이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뒹굴다가 남몰래 지은 죄 많아 낯 들고 살기 쉽지 않으니 죽은 듯이 살아서 하늘이나 바라보세. 눈 침침해 앞이 잘 안 보이면 돋보기 안경을 쓰고, 안경을 써도 잘 안 보이면 눈짐작으로라도 하늘 뚫은 별자리 하나 미리 봐두세. 내일 일을 생각하여 마음속에 묻어두세. .................................................................... 지금이 중늙은 때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중늙은 시절로 돌아가 있다면 억울타 못해 허폐가 디비질 일이다. 이.. 2022.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