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지 두어 달만에 또 보자는 약속을 잡았다.
여러 약속 중에 빈도가 가장 많은 것은 만남의 약속일 것이다. 나는 되도록
시간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 당연히 약속한 상대편도 그래 주기를 바란다.
약속 장소에 가기 전, 즈그마이가 당부한 급한 볼일을 보느라 시간을
좀 까먹었다. 일을 보고 서둘러 바퀴를 굴려 도착한 시각은 다행히
십 분 전이었다.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지금 가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란 말을 기대했다.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차문을 여니 옆에 주차한 몇 차 건너에 그의 모습이 보인다.
이미 와 있었다. 미리 와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그는 내게 푸짐한 웃음을
보이며 반긴다. 그의 웃는 눈은 하회탈의 그것과 닮았다.
그때부터, 나이는 들었어도 철없는 중늙은이와 나이는 덜해도 외려 어른 같은
젊은 아저씨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먼저 순대 국밥부터 맛있게 먹었다. 둘 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릇을
싹싹 비웠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뚝배기를 보고, 식성도 비슷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는 한편, 처음 만났을 때처럼 주접 떨지 말고 오늘은 저 뚝배기
밑바닥처럼 내 속을 훤히 다 드러내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졌다.
에나 곶감이다. 나는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벌써
반 길이나 넘게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나의 단점이 여과 없이
드러난 것이다.
나는 서먹한 자리에서는, 혀가 없는 사람 같이 과묵하고 '퍼석'한 편이다. 반면
조금 안다 싶은 자리에서는 말이 폭주를 한다.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병이라면
병이다. 이런 내가 정말 싫지만 태중 병이다 보니 달리 방도가 없다. 방법이
없다는 그것조차도 뿔따구가 난다.
그는 특별한 기량으로 그만이 그려낼 수 있는 독창적인 사진 세계를 가진
사진가이다. 얼마 전 나는 그의 사진을 두고 ''그의' 장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가 가진 특별한 렌즈를 '요술 렌즈'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그는 상당한 수준의 사진가지만 그가 가진 사진 장비의 수준은 매우 낮았다.
그가 가진 촬영 장비 중 신품으로 구한 것은 하나도 없단다. 기계적 가치로
따지면 거의 고물에 가까운 물건만 가졌다는 얘기다.
경기도에 거주하시는 블친이 한날 내게 물었다.
사진이 아주 정교한데 어찌 그리 찍을 수 있냐고. 생각할 것도 없이 답변을
드렸다.
"잘 찍었다기보다 디지털 기계의 성능이 워낙 뛰어나 그리 찍힌 것이다.
그나마 내가 한 게 있다면 기껏 숨 잘 참고 셔터를 누른 것 뿐이다."
나는 과분한 렌즈를 하나 가지고 있다. 수동 100mm 접사 렌즈.
근 십오 년 넘게 애용하는 렌즈다. 허접한 내가 이런 렌즈라도 쓰니
그분에게 그런 말도 듣는다지만, 그는 싸구려 장비를 가지고도 개성이
난무하는 작품을 담아낸다. 중원의 진정한 고수와 어정잡이 하수는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차를 마시려고 자리를 옮겼다. 그곳은 눈에 띄는 대로 마구잡이로 들어간
찻집이 아니었다. 들어서자마자 그는 어느 한 자리로 나를 끌었다.
그러니까 그는 내게 그 요술 렌즈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렌즈가 가진 고유의 특성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자리를 눈여겨 보고
나를 이끈 것이었다.
그가 꺼내 보여준 렌즈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사진기 렌즈 같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노련한 기계쟁이가 선반으로 깎은 가공품 같기도 하고,
외경이 굵은 수도 배관의 커플링처럼 생겨 보이기도 했다.
내 사진기에 끼워 찍어 보았다. 희한했다. 그가 표현해낸 사진만큼 멋지진
않았지만 꽤 그럴 듯 했다. 지금 바로 위 두 컷과 아래에 삽입할 두어 장의
사진이 그 결과물이다. 빛망울 처리가 일반적인 고급 렌즈의 '보케'처럼
영롱하지는 않지만 매우 독특한 이미지를 그려낸다.
렌즈 맛보기를 마치고 그를 따라 나섰다. 나를 데려가면 좋을 것 같은 곳을
이미 마음으로 물색해 놓은 것 같았다.
천천히 산책하듯 걸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닌 그곳은, 시골 집들만
옹기종기 붙어 있었고 절집 같이 한적했다. 골목에는, 어깨에 사진기 걸치고
걷는 듯 섰는 듯 가만가만 움직이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빵빵거리며 지나는 차도 없고, 흘깃거리며 쳐다보는 사람도 없고, 꼬리치는
개도 없었다. 아니구나. 전원에 어울리지 않는 어느 양옥집 대문 곁에서,
낯선 인간들이라는 눈치를 채고 왈왈거리는, 돈 깨나 주고 데려왔을 듯한,
새까맣고 다리 길쭉한 개, 딱 그 한 마리의 개가 목사리에 매인 채 동네의
적막을 찢어 놓기는 했다.
점심 먹고 차 마시고 각자 집으로 돌아 오려던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어중 노인네와 젊은 축의 사람이 만나 이리 재미져도 될 일인가.
우리랑 코드가 안드로메타인 사람이 보면, 별쭝난 인간들도 다 있다 할지
모르지만,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시간을 보낸 게 어디 우리 잘못인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했다.
못났다는 전제를 둘에게 같이 갖다 대면 그는 볼멘 입을 할지 모르지만,
제 성향이 내향인지 외향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한 사람과, 지극히
내향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만나 허물없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도끼 자루가 썪는지 마는지 어찌 살필 겨를이 있겠는가.
게다가 비슷한 취미와 조금은 닮은 듯한 면모를 지닌 둘이 만났으니, 세상
이야기, 일 이야기, 사진 이야기, 여자 이야기, 얄라구진 시험 친 이야기...
종교와 정치 이야기는 부러 피한다 치고 나눌 이야기야 오죽 많을까.
더군다나 무슨 남자들이, 그것도 나이깨나 먹은 축들이 쓰잘데없는 수다가
와 그리 많노, 하면서 대중없이 끼어들 푼수 같은 여인네도 곁에 없으니
시간 보내기가 여간 쏠쏠하지 않겠는가.
유난히 옹기가 많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그도 좋아하고 나도 자주 들르는
바닷가로 갔다. 먼 바다에 줄줄이 엮인 섬들이 바라보이는 카페에 앉아,
기운이 처지는 사람은 십전대보차를, 건장한 사람은 커피를 시켜 마셨다.
그를 만나 많은 이익을 챙겼다. 한물간 나보다 유익한 정보를 많이 보유한
그로부터 알찬 정보를 항거슥 빼먹었다. 이러니 자주 봐도 밑질 게 없기
때문에 공백을 짧게 두고 또 보자고 주책을 떨고 싶지만, 통 눈치가
젬병이지는 않아서 함부로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차를 마시고 바닷가로 나섰을 즈음 배가 고팠다. 배만 그런게 아니라
아직 대화도 더 고팠는지 둘은 만장일치로 저녁밥 집으로 향했다.
어떤 것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메뉴 선택도 잘 통했다. 둘 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역시 싹싹 비웠다. 담백닭국밥이었다.
헤어지면서 그는 나에게 당부했다. 집으로 퍼뜩 들어가지 않고 일없이
서성거리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얼마나 속을 디벼 보였는지,
아니면 내 속이 얼마나 얕아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나에 대해 이미
많은 부분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마고 하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에겐 미안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마산 합포만에는 최근 해양누리공원이 생겼다. 밤에 바다를 끼고 걷기에
참 좋은 공원이다. 창원에 살면서도 나는 그 공원을 자주 걸었다.
낮에는 추운 줄 몰랐는데 밤기운은 꽤 찼다. 바람도 불었다. 끝까지 갔다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차에 상비한 패딩을 덧껴입고 걸었다.
그렇게 청승을 떨다가 추위에 진저리를 칠 즈음 귀갓길에 올랐다.
꿈 같은 시간은, 선녀 닮은 어여쁜 사람과 꽁냥꽁냥해야만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는 걸 어제 또 한 번 절실하게 느꼈다는
얘기를 한다는 게, 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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